[글지음][뚝딱 지음 62호] 공현의 투덜리즘 - 세상에 잘 들리지 않는 말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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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공현의 투덜리즘 - 세상에 잘 들리지 않는 말


올해 ‘청소년활동가마당’에는 청소년운동과 퀴어/섹슈얼리티 단체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활동가 등을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셰어 활동가가 단체를 소개하면서, 이름의 ‘성(性)적 권리’를 잘못 알아듣고 “‘(학업) 성적 관리’ 해 주는 데인가요?”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는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하고 나서 기사가 나가기 전 확인을 해 달라고 보내왔는데, 단체 이름을 “다양한 직업으로 삶을 바꾸는 청년 가방끈”이라고 써 놓았던 것입니다.(저는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외에도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꾸 읽다 보니 은근히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의미상으로는 ‘대학 입시를 거부한다’라는 것과 ‘다양한 직업(을 찾는다)’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청년’ 자는 꼭 들어가네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슷한 일이 또 있었습니다. 한 학회에서 연 토론회에서, 페미니즘 교육 등을 주제로 발표하던 지음 활동가가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청소년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실시간 문자 통역을 하던 사람이 그 말을 “퇴학당하기 싫어하는 청소년들”이라고 옮기더라고요. 나중에 유튜브 중계 영상을 확인하다가 그걸 발견한 그 활동가는 ‘왜 이렇게 주류 프레임이야?’ 하고 투덜거렸더랬죠. 청소년인권운동만 이런 것도 아닙니다. 30년 넘은 역사를 가진 여성인권단체인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로부터,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자기 직장을 병원에서 “한국상품력상담소”라고 기입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2년 연속으로.
하나하나 놓고 보면 그저 해프닝 같지만 이런 장면들은 인권운동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인권운동이 다루는 문제들, 이야기하는 언어들은 이 세상에게는 낯선 말, 익숙하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상식과 선입견, 인식의 틀, 사고의 습관을 갖고서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인권운동에서는 그런 틀을 비틀거나 벗어나는 말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존재했지만 인식되지 않았던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새로운 말을 발명하기도 합니다. 자주 쓰이는 단어지만 평소 잘 연결되지 않는 단어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뒤에는 “보호하자”, “사랑하자”, “위해” 같은 단어가 따라오는 것이 우리 사회의 규칙인데, 청소년인권운동에서는 이를 비판하며 “우리 아이들 좀 그만! 우리 아이들 타령 거부한다!” 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 번씩 순간 잘못 들었나,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권활동가들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야만 합니다. 잘 못 알아들은 사람에게 똑똑히 들으라고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그리고 인권운동의 말이 조금이라도 덜 낯설어지도록. 이야기한 내용이 곡해되기도 쉽기 때문에 계속 설명도 해야 합니다. 그런 모든 것이 인권운동의 관점과 가치가 우리 사회에 좀 더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한 실천입니다. 인권운동은 세상에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조금 더 잘 들리게 만들려는 일입니다. 그동안 경청받지 못하던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뜻에서도 그렇고, 우리 사회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언어를 익숙해지게 만든다는 뜻에서도 그렇습니다.


🔸 '공현의 투덜리즘'은 예전에 공현이 함께 만들었던 〈오답 승리의 희망〉의 간판 코너명이었는데요. 오승희를 기리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 사진- 2023년 5월 13일, 학생인권 후퇴 반대! 청소년인권 보장 요구! 오픈마이크 행사에서 발언하는 공현 활동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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